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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

두 아들
    언젠가 신문에서 오케스트라 지휘자 구자범 님이 쓴 ‘좋은 귀’를 가진 지휘자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악기를 다루는 연주자 입장에서는 ‘좋은 귀’를 가진 지휘자라면 자기 연주가 조금만 틀려도 대번에 그것을 잡아내고 지적할 테니 매번 긴장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지휘자는 실수로 틀린 소리가 났을 때도 곧바로 그 단원을 쳐다보지 않는 훈련을 한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들이 본당신부 입장에서는 크게 공감이 됩니다. 신자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일희일비’(一喜一悲), 일일이 반응하지 않으려고 애써 노력하고 있는 저희들 입장이 생각나서 혼자 슬며시 웃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나의 편안함’이 우선이 되고, 기준이 되는 사회 분위기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연주자들이 자신의 실수를 지적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 주는 적당히 ‘무딘 귀’를 가진 지휘자를 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저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을만한 ‘무난한 지도자’(사목자)를 원하는지도 모릅니다. 복음을 대할 때마다 성경말씀이 누구에게는 ‘기쁜 소식’(해방의 말씀)이 되기도 하겠지만, 어떤 누구에게는 듣기 거북하고 불편한 ‘껄끄러운 말씀’으로 들리기도 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 나오는 에제키엘 예언자뿐만 아니라, 모든 예언자는 어느 시대나 기득권자들에게 반대 받는 표적이 되었습니다. 늘 입바른 얘기로 돌직구를 날리는 그들이 불편했던 것입니다. 그런 이들에게는 오늘 복음 또한 그렇게 들릴 것입니다. ‘예’라고 대답만 하고, 전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이들보다는, 오히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의외의 인물들, 세리와 창녀와 같은 ‘변방의 사람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마태 21,31 참조)이라는 소식이 곱게 들릴 리가 없는 것입니다. 교리 때나 강의 때 교우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 즉 예수님의 행동원칙을 얘기하면서 예수님은 남녀노소, 지위고하의 장벽을 넘어서 사회적 약자와 죄인들, 소수자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돌아서면 누가 만들어낸 말인지는 몰라도 아주 절망적인 얘기들이 쏟아집니다. “강한 자가 끝까지 살아남은 게 아니라, 끝까지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혹은 “억울해? 억울하면 출세하면 될 거 아니냐?”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말들은 출세 지향적 그리고 성과주의, 일등주의를 부추기는 말들입니다. 이런 말들이 조금 전 교리 때 나누었던 예수님의 행동원칙, 뒤처진 자들에게 연민의 마음을 갖고, 남을 배려하고, 함께 연대(連帶)하며, 섬기는 자세를 가지라는 ‘지킬 교리’가 과연 실생활에서 얼마나 호소력을 가질까 하는 갈등이 생길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지금 우리 사회가 또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 그분의 행동원칙이 더더욱 필요하고 유효한 ‘목마른 시대’는 아닐까합니다. 주님의 복음이 나에겐 ‘생명의 말씀’인지, ‘불편한 말씀’인지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이명찬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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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별빛

등록일2014-09-29

조회수5,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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