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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의 시간과 한숨의 시간


움직임의 시간과 한숨의 시간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본당에서 열심히 봉사하시는 모든 분께 하느님의 축복을 빕니다. 오늘 마태오 복음과 비슷한 설정이 루카 복음 19장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보다는 맡겨진 금액이 훨씬 큰 것이 눈에 띕니다. 루카 복음에서는 각각 한 미나(100데나리온=60분의 1 탈렌트)씩만 맡기지만, 마태오 복음에서는 첫 사람에게 다섯 탈렌트(=30,000데나리온), 둘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12,000데나리온), 셋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6,000데나리온)를 맡깁니다. 아주 큰 금액이 맡겨진 것입니다. 제일 적게 받은 사람에게도 사실 충분한 금액이 맡겨졌습니다. 충분한 금액과 충분한 탈렌트! 우리가 받은 것이 적다고만 할 수 있을까요? 내 인생에는 정말 초라한 탈렌트만 주어졌을까요? 혹시 초라하다고 생각한 것은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보고 지레 겁먹은 것이 아닐까요? 남보다 적게 받아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마태 25,19) 이 ‘오랜 뒤’는 주인의 입장에서 종들에게 위탁 재산을 활용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주었다는 뜻이 됩니다. 금방 셈하시지 않고 시간까지 충분히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삶의 시간 속에서 열심히 일하는 ‘움직임의 시간’과 세상을 탓하는 ‘한숨의 시간’이 잘못 섞여 버리지는 않았는지요? 움직이면 될 것을, 한숨으로 나를 어딘가에 숨기고 있지는 않는지요? 마치 맡겨진 한 탈렌트마저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마태 25,18)라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땅에 돈을 그냥 묻어 두는 행동은 주인이 돌아올 때를 대비하여 그에게 해명할 명분만을 준비하느라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합니다. 변명거리를 미리 준비해 두느라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시작도 안 한 것입니다. 그냥 숨겨둔 채 숨죽이고 시간만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숨겨둔 수많은 탈렌트들이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에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탈렌트들이 그냥 묻혀진 채 또 시간이 지나고 있음을 봅니다. 아주 작은 봉사라도 지금 당장 나설 것을 청합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두려운 나머지… 도로 받으십시오.” (마태 25,24-25) 셋째 종의 변명입니다. 논리적으로는 맞는 듯이 보이지만, 문제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주인의 위탁을 자신의 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일로 여길 때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이 납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할 사람이라고 스스로 여길 때 문이 열릴 것입니다. 또 그는 주인의 됨됨이를 관대함이 아닌 탐욕과 냉혹함으로 잘못 판단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두려움과 게으름을 먼저 탓하기 전에 주인을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세상에 대한 원망과 탓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만들고 맙니다. 두려움에서 벗어난다면 나에게 주어진 탈렌트로 더 많은 것을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풍성한 주님의 은총을 기도합니다. 서울대교구 강귀석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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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별빛

등록일2014-11-17

조회수5,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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