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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그리고 이웃



가족 그리고 이웃


    좋지 않은 일 때문에 오랫동안 쉬었던 연예인이 방송에 나와서 흔히 하는 말 “내가 힘들 때 나에게 힘이 되고 의지가 되어준 것은 역시 가족뿐이었다.” 저는 이 말을 들을 때 참 아슬아슬한 느낌이 듭니다. 마침 오늘이 성가정 축일입니다만, 우리는 때론 이 ‘가정’의 의미를 자기 편리대로 한껏 축소해서 ‘나를 보호해 주는 보호막’ 정도로, 남들을 배제시키는 ‘폐쇄적 공동체’의 의미로 이용하고 있지 않나 싶어서 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내가 받는 상처는 주로 누구에게 받는가? 상처의 원인은 주로 내가 잘 아는 사람, 내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멀리 있는 사람, 나와 별 관련이 없는 사람이 던지는 상처 될 만한 심한 말도 한번보고 말 사람이라고 흘려버리면 그만이고, 설사 멱살을 잡고 싸우더라도 별로 가책을 느끼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영원한 지원군으로 여겼던 가까운 가족에게 받는 상처가 의외로 많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것보다도 가정 폭력, 부모의 불화, 가족의 무관심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가정폭력을 경험한 사람이 차마 부끄러워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그저 ‘나는 괜찮다, 괜찮을 거야’라며 자기최면을 걸면서 살고 있긴 하지만, 내 상처의 많은 부분은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받은 상처가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과거엔 집 하나에 여러 가구가 함께 사는 셋방살이가 있었습니다. 부엌 딸린 방 한 칸을 얻어 사는 신혼부부 외에도, 좀 넓은 집이면 위채 아래채 나누어 세를 사는 집도 많았습니다. 이럴 경우 특별히 권위를 내세우는 고약한 집주인이 아니라면 보통 한 식구처럼, 적어도 좋은 이웃으로 살았습니다. 세 들어 사는 아이들끼리는 좋은 놀이상대가 되어 주었고, 무엇보다 외출해서 아무도 없을 때 집도 봐주고, 편지도 받아주고, 연탄불도 대신 갈아주고, 소나기라도 오면 널어놓은 빨래도 걷어주고, 장독대 뚜껑도 덮어주는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적어도 우리 세대는 이런 것들을 보고 배우며 몸에 익히며 그렇게 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뚜껑을 대신 덮어줄 장독대가 없습니다. 세탁에서 건조까지 뚝딱 해결해 주는 성능 좋은 세탁기가 있기에 빨래도 대신 걷어줄 필요가 없게 됐습니다. 무엇보다 ‘이웃’이 없어졌습니다. 여기서는 남들이 흔히 말하는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 문제가 아닙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건만 서로를 챙겼던 이웃이 사라지다 보니 모든 관심과 에너지는 오로지 ‘내 가족만, 내 자식만’으로 쏠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요즘은 통 큰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오로지 내 혈육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 ‘단란한 가정’ 인냥 착각하기도 합니다. TV를 보면서 뉴스에 비춰지는 고통당하는 이웃의 얘기들도 나와 상관없는 ‘남의 얘기’가 되어 버립니다. 어쩌면 우리는 주변 이웃에겐 눈 돌릴 생각도 안 하고, 오로지 코앞의 것만 쳐다보면서 달리기만 하는 ‘말 잘 듣고, 순종적인 종마(種馬)’로 길들여지는 것을 ‘가정의 숭고함’ 등으로 포장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볼 일입니다. 서울대교구 이명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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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별빛

등록일2014-12-30

조회수6,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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