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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치를 위한 ‘성령’


일치를 위한 ‘성령’ 
    오늘 교회는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냅니다. 
    성령 강림은 교회에 있어서 가장 큰 축일일 것입니다. 
    바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시는 것을 통해 교회 역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는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성령 강림 사건을 듣게 됩니다. 
    유다교의 축제인 오순절에 성령께서 내려오셨다고 전하는 사도행전은 
    사건 자체보다는 그 결과에 더 관심을 기울입니다.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이것이 성령 강림 사건의 전부입니다. 성령은 구약성경에서 주님의 현존을 
    상징하던 불(꽃)의 모양으로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모든 이들에게 내려옵니다. 
    이후에는 많은 내용을 소개하는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혀 모양으로 내려온 성령, 
    그것에 맞게 사람들은 서로 다른 말을 쓰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이 표현에서 우리는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바벨탑 이야기는 내용적으로 성령 강림의 효과와 반대되는 이야기입니다. 
    같은 말을 쓰던 사람들은 모여서 모의합니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 
    이 표현은 바벨탑 이야기의 내용을 요약해 줍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명성을 위해 하늘에 이르는 탑을 쌓고, 
    그것의 결과로 온 땅으로 흩어질 것임을 암시하는 내용입니다. 시작부터 결과를 
    미리 알려주는 셈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바벨탑 사건의 결과는 이렇습니다. 
    “그곳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온 땅의 말을 뒤섞어 놓으시고, 사람들을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기 때문이다.”
    
    바벨탑의 이야기는 욕심의 결과로 인한 분열을, 
    그리고 성령 강림은 그 분열로부터의 일치를 이야기하는 사건입니다. 
    오늘 듣는 모든 성경의 말씀은 일치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몸의 지체는 많지만 한 몸인 것처럼” 우리 모두 한 성령 안에서 
    한 몸이, 곧 하나가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은사는 여럿이지만 
    그것을 가능케 하는 분은 하나의 성령입니다. 결국 성령은 
    우리를 하나의 공동체로 만드는, 다양한 우리를 한 몸이 되게 하는 힘입니다.
    
    오늘 복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마치 오늘 복음은 성령을 통해 얻게 될 
    일치가 용서를 바탕으로 한다고 전하는 것 같습니다. 서로의 죄를 용서하고 
    서로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성령 강림 대축일에 우리가 들은 말씀입니다.
    
    성령은 일치를 위한 것입니다. 분열된 우리를 다시 하나로 만드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서로 화해하는 것이고, 
    서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정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분열되어 있다면, 서로 용서하고 화해할 수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성령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라는 말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 부활과 승천, 성령의 강림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는 예수님의 죽음, 우리가 죽음으로 표현되는 
    악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임을 보여주는 부활과 승천, 또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하는 성령의 강림은 서로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죄의 용서와 
    일치와 구원. 부활시기를 마치면서 우리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가르침입니다. 
    서로 용서하고 있습니까?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 화합하고 일치를 이루며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우리가 희망하는 구원의 모습일 것입니다.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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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별빛

등록일2015-05-26

조회수3,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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