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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 지금껏 살아오면서 잘 쓰지 않는 말이 두 개 있다.
    “사랑한다.”와 “행복하다.”
    원래 내성적이라 그런지 아니면 복잡한 인생관을 지니고 있어서 그런지 
    왠지 사람에게 ‘사랑한다.’ 는 말은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져 말하기 어렵고, 
    ‘마음이 변할까’, 혹 ‘진심은 아닐까’ 고민된다. 
    대신 ‘좋아한다.’ 는 표현은 편하고 정감 있게 느껴지기에 종종 사용한다. 
    또한 ‘행복하다.’ 는 말은 그 행복이 금방 날아가 버릴 것 같아 말하기 어렵다.
    행복한 때가 언제였나를 생각해보면 과거의 일인 것 같고, 막상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행복 속에 숨어있던 아픔과 건조함을 만날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나는 행복보다는 가끔 ‘만족’ 이라는 개념이 더 편한 것 같다. 
    그때그때 가끔, 나는 ‘만족’ 한다.
    행복이란 의미는 나에게 좀 어렵고 숭고하다. 
    서양의 사람들이 해피(Happy)라는 단어를 우리의 강아지 이름 ‘해피’처럼 
    서슴없이 쓰는 것을 보면, 혹시 그들의 해피(Happy)는 우리의, 적어도 
    나의 ‘행복’ 이라는 한국말과 의미가 다른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주변 이웃들이 행복하다는 고백을 자신 있게 또는 조심스럽게 
    내게 건넬 때는 나는 내심 그들이 부럽기도 하지만, 
    행복은 내게는 너무나 숭고하여서 ‘나의 행복 개념이 조금은 
    그들의 것과 다르지 않을까?’ 하며 위안하곤 한다.
    나에게 있어서 행복은 쉽게 얻을 수 없고, 쉽게 얻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세상 모든 것에는 목적이 있다. 
    인간의 삶에도 목적이 있다. 
    공부를 잘하는 것, 좋은 직장, 결혼, 안락한 삶, 안정된 노후 등등. 
    그러나 이러한 모든 목적의 계단 맨 꼭대기엔 ‘행복’ 이 자리한다. 
    모든 목적은 그보다 한 단계 더 고차원적인 목적의 수단이 되지만,
    최고의 목적인 ‘행복’ 은 결코 수단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왜 좋은 직장을 원하는가?” 하고 스스로 묻고 답을 
    찾을 수 있어도 “왜 행복하기를 원하는가?” 라고 물을 수는 없다.
    
    현대의 많은 이들이 행복을 추구한다. 아니 모든 이들이 그렇다. 
    때문에 육체와 영혼의 합일체인 우리 인간들은 물질을 추구하고, 
    안락함을 원하고, 정신적인 명예를 추구하며 사람들의 사랑을 갈구한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전부 가졌을 때 우리는 모두 “행복하다.” 고 과연 
    외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 혹 몇몇은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그 숭고한 단어를 진심으로 고백할 수 없을 것 같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복에 관해 말씀하신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그런데 그 말씀이 이해하기 어렵다. 심오하고 역설적이다.
    그래서 오히려 나에겐 더 마음에 끌린다. 
    예수님은 진리의 절대적 기준이 아니신가!
    예수님께서 오늘 입으로 직접 말씀하신 그 ‘행복’ 을 나도 따라 고백하고 싶다. 
    
    
    
    인천 가톨릭대학교 조형예술대학
    김웅래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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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별빛

등록일2015-11-03

조회수2,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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