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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주일

(이상욱 신부님의 대림3주일 강론을 옮긴 것입니다.)

 

오소서 성령님! 연말을 어떻게 잘 보내고 계신가요?

오늘은 대림 제 3주일입니다. 대림 제 3주일은 기쁨의 주일이라고도 합니다.

오늘 입당송에서는 이렇게 노래를 합니다.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

점점 성탄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죠. 연말이 되면 이런 저런 모임들이 많아집니다. 송년모임을 하는 것이죠. 요즘은 김영란법 때문에 예전처럼 그렇게 모임이 많지 않다고들 하는데 정말 모임이 좀 줄으셨나요? 김영란법과 관계가 다 없으시죠?

저도 김영란법하고는 관계가 별로 없어서 여전히 좀 분주한 것 같습니다. 분주함 속에 기다림이라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묻혀 버리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한 주 한 주 대림초를 하나씩 더 밝히며 성탄이 다가오고 있음을 의식합니다. 이제 초가 3개 가 밝혀졌죠. 또 성경 말씀 역시 그 기다림이 점점 고조됨을 알려줍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실 메시아의 앞길을 닦으면서 회개를 외칩니다. 그리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 감옥에서 나자렛 예수의 소문을 듣게 되죠. 이제 나의 기다림이 열매를 맺는 것일까?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며 이렇게 묻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아직 요한은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의 정체를 다 알고 있지는 못했던 거죠. 그래서인지 예수님은 요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세례자요한에 대한 대단한 칭찬을 하고 계시는 거죠. 그리고 곧 이어서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한껏 추켜올렸다가 또 별 사람 아니다. 들었다 놨다 하시는건가?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요한을 대단히 큰 인물로 칭찬하시고는 하늘나라의 가장 작은이라도 요한보다는 크다.”는 말씀이 무슨 의미일까?

하늘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알아야죠. 하늘나라, 영원한 생명이란,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영원한 생명이라는 거죠. 하늘나라는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나라입니다. 그분과 함께하는 나라인거죠. 그러나 세례자요한은 아직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가 누구이신지를 모르고 있죠. 그래서 메시아를 알고 또 그 분과 함께 하고 있는 하늘나라의 가장 작은 이라도 요한보다는 크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고 있을까요?

 

지금 이 기다림의 시기에 우리가 기다리는 분이 어떤 분이신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기다린다면 우리가 그분을 맞이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흔들리는 갈대이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세 번이나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묻습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처럼 남들이 하는 말대로 따라 다니거나 혹은 자기 좋을 대로 자신이 기대하고 원하는 것만을 찾아 나선다거나 혹은 화려하고 부유한 곳에 마음을 두고 있다면 그런 곳에 예수님은 계시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러 이 성당에 나왔습니까? 세상 속에 살아가는 나는 오늘 무엇을 보며 살아갑니까? 내 마음속에 무엇이 가장 중심에 자리 잡고 있을까요? 성탄은 우리 안에 오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고 그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함께 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먼저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를 표현하는 가장 큰 상징이 뭘까요? 그리스도교를 드러내는 상징,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그리스도교를 상징하는데, 성탄 대축일을 표현하는 가장 드러나는 상징이 뭘까요? 크리스마스 트리, 이런 게 성탄을 상징할까요? 아닙니다, 성탄 대축일 그 성야 밤에는 제대 앞에 뭘 이렇게 꾸며놓죠? 구유를 꾸며 놓습니다. 바로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신 그 구유가 성탄을 잘 드러내줍니다. 그런데 그 구유라는 것이 어떤 거에 쓰이는 것이죠? 소나 말의 여물을 넣는 곳, 말 밥통입니다. 여관조차 얻지 못해서 그런 외양간에서 예수님은 말 밥통에서 태어나셨죠. 세상에 오신 모습이 바로 그렇습니다. 가난하고 겸손한 모습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언제나 가난하고 작은이들과 함께하면서 그들을 높여 주시기 위해서 자신을 낮추고 낮추셨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 먼저 그렇다면 우리도 가난해지고 낮아져야 합니다. 가난뱅이가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런저런 욕심이 있다면 그걸 좀 비워내고 마음에 쌓인 불필요한 것들이 있다면 그런 것들을 좀 내려놓고 우리 안의 예수님을 모실 그런 말 밥통 말구유를 마련해야 된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은 비우기보다 계속 계속 더 채워야 한다고 주문을 외웁니다. 자신을 낮추기 보다 더 높아지려고만 합니다. 소나 말의 밥통에 태어난 인생이 있다면 불행하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흑수저보다는 금수저를 잡고 태어나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다면 또 물어 보시겠죠. “너희는 무엇을 보러 나왔더냐?” 비우지 않고 낮추지 않으면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볼 수도 없고 내 안에 채울 수도 없습니다.

 

오늘 성체 안에서 끊임없이 우리 안에 먹히시는 그 예수님의 모습처럼 나도 가족에게 이웃에게 기꺼이 먹히고 힘이 되어주지 못한다면 그분이 누구신지를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자 합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무엇을 보러 나와 있을까요? 우리 자신의 마음을 과 같이 욕심 없이 꾸밈없이 소박하게 그렇게 비워낼 때 우리 안에 예수님을 모실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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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별빛

등록일2016-12-12

조회수2,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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