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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사순 제1주일(2017.3.5.)-이상욱 요셉 신부님

(사순 제1주일: 2017.3.5.-이상욱 요셉 신부님의 강론을 옮긴 것입니다.)

 
오소서 성령님!(새로 나게 하소서)

한 주간 잘 지내셨죠?(예)

사순 시기의 첫 주일입니다. 사순절에 우리가 나름대로 다짐한 것들이 있을텐데, 잘 실천하고 계신가요? 다짐한 것이 없으면 실천할 것도 없을텐데, 그래도 오늘부터라도 사순절을 어떻게 잘 보낼 수 있을까하는 좋은 다짐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사순절을 맞아서 뭘 결심할까 생각하다가 작년에 이어서 다시 한 번 금주를 해볼까? 지난 주에 공지사항 때 그만 그런 애기를 했었는데요, 불과 4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지난 재의 수요일 다음 날 목요일에 대전가톨릭대학교 입학미사가 있었습니다. 우리 본당에 선동우 라파엘이 입학을 해서 신학생이 되었죠. 제가 추천 본당신부, 흔히 아버지 신부가 되는데요, 입학미사에 갔더니 또 신학교 교수신부님들이 어떻게 매년 그렇게 쑥쑥 잘 낳냐고 막 얘기들을 해서 기분이 참 좋았구요, 미사를 마치고 점심식사를 세종시에 아주 맛있는 곰탕집을 갔는데요, 진국인 곰탕 국물에 수육하고 소 양이 팔팔팔 끓고 있었어요. 그리고 또 우리 김지훈 부제님 동기들이 또 맛있는 것을 먹을 걸 기대하면서 서너 명이 같이 나왔어요. 그래서 우리 교우들 마흔 몇 명 다 같이 식당이 꽉차서 한쪽 테이블에 부제님들, 신입생 다 이렇게 앉았는데, 그 기쁜 날인데 아무도 축배를 들지 않는 거예요. 왜? 본당신부가 안 먹고 있으니까. 그래서 제가 어떻게 했겠어요?(웃음) 그때 떠오르는 성경말씀이 있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단식을 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는 것이오?”

그랬더니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셨어요?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혼인 잔치에서 어떻게 단식할 수 있겠냐? 신랑을 잃을 때가 있으니 그때는 단식할 거다.”

이런 좋은(웃음) 혼인잔치 같은 신입생이 탄생했는데, 이런 날 어찌 금주를 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그래서 술을 따르고 축배를 들었더니, 분위기가 어떻겠어요? 신자분들 다 가고 남아서까지 계속 축배를 들다가 왔는데요, 그 다음 다음 날 어제이죠. 본당에 남성 꾸르실료 교육을 세 분이 잘 다녀오셨습니다. 잘 다녀오셔서 어저께 저녁에도 환영식에 같이 이렇게 소감을 발표하는데, 여인의 눈물은 마음을 짠~하게 하는 거 같아요. 그런데 남자의 눈물은 어때요? 마음이 막 이렇게 감정이입이 되는 거 같아요. 눈물을 이렇게 흘리시면서 소감발표를 하시는데요, 그러고 나서 환영식에 또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서 했는데, ‘아 오늘은 정말 절제해야겠다.’ 그랬는데, 그 교육을 다녀오신 형제님이 “잘 다녀왔습니다. 신부님, 너무 고맙습니다. 좋은 교육 보내주셨습니다.”이러면서 술잔을 딱 주는데 제가 받았겠어요?, 안 받았겠어요?(웃음)

그때는 어떤 성경말씀이 떠올랐냐면,(웃음) 그때는 성경말씀이 떠오른 게 아니라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버린 몸,(웃음) 엊그제도 술을 마셨는데, 뭐 이번 한 번 더 먹어도 되지. 막 이런 생각이 들어서 어제 저녁에 맛있게 또 축배를 들었습니다.

제가 다른 거는 그럭저럭 잘 지키는 것 같은데, 이런 자리에만 가면 쉽게 결심이 무너지곤 합니다. 그래서 사순 제1주일을 맞아서 제가 결심을 바꿨습니다. 금주를 하는 거보단 절주를 하는 게 낫겠다.(웃음)


오늘 사순 제1주일의 주제, 미사의 주제, 독서와 복음은 ‘유혹’에 대한 그런 이야깁니다.

로마 베드로대성전에 가보면 바닥에 재미있는 표시가 되어있는데요, 로마 베드로 대성전은 어마어마하게 큰 성전입니다. 그런데 그 중간쯤에는 세계 여러 나라 수도에 있는 주교좌성당 이름이 써 있어요. 시드니의 세인트 메리 성당이 써 있구요, 중간쯤 가면, 조금만 더 가면 밀라노의 대성당, 두오모 성당 이름이 써 있고, 조금 더 가면 파리의 노틀담 성당이 써 있고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게 뭘 표시하냐면, 그 성당의 크기입니다. 베드로 대성당에 비해서 이 큰 대성당들이 얼만한 지를 비교해 주는 거죠. 명동성당은 거기에 있을까요? 없을까요? 거기에 끼지를 못합니다. 명동성당도 대단히 큰데, 그만큼 베드로 대성당이 크다는 걸 이렇게 금방 느낄 수 있게 비교를 해주는데요.

 
조금 그런 것과는 다른 비교이지만, 오늘 1독서와 복음은 그런 두 모습을 비교해 주고 2독서는 방금 전에 우리가 들었죠. 한 사람을 통해서 그 사람의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왔는데, 한 사람의 순종을 통해서 모두가 다 의롭게 됐다. 계속 그렇게 비교를 바오로 사도는 하고 있습니다.

 
1독서 아담과 하와는 천상낙원, 에덴동산에서 부족할 것 없이 그렇게 살았지만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부끄럼 속에 자신의 몸을 숨겨야 했던 이야기가 나옵니다.

복음에서는 광야에서 40일을 밤낮으로 단식하며 기도하시는 예수님께서 악마의 집요한 유혹을 어떻게 물리치셨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풍요로운 땅 에덴동산에서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 사람이 살기에도 너무나 척박한 땅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신 예수님,

유혹을 물리치고 안 물리치고는 내 삶이 굉장히 풍요롭고 좋은 여건일 때 유혹을 잘 넘어설 수 있을까 없을까? 그런 것과는 어쩌면 이 사순시기에 더 척박한 모든 것을 비워내고 내려 놓는 그 광야로 나아가야 된다는 말씀으로도 들립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독을 지닌 뱀은 위험한 동물이죠. 소리 없이 기어 다니기 때문에 발견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위험한 거죠. 유혹은 독을 품고 있지만 그것을 숨기고 소리 없이 아주 그럴 듯하게 다가옵니다.

이렇게 유혹하죠.

“하느님께서 어떤 나무 열매도 따먹지 말라고 했다며?”

이렇게 한 번 쿡 찔러 봅니다.

하와는 아주 순진하게,

“물러가라 뱀아.”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아니야, 다 따먹어도 돼, 그런데 저 동산 가운데에 있는 열매만은 따먹지 말라고 하셨어.”

이미 유혹자와 말을 섞기 시작하면 어떻게 돼요? 계속 그 안으로 끌려 들어갑니다.

조금 후에 복음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뱀은 말합니다.

“결코 죽지 않는다. 괜찮다.”

유혹은 늘 이렇게 호언장담을 합니다. 따먹을 수 있는 열매에 대해서는 과대포장을 해서 얼마나 좋은지를 과장하지만 그 유혹에 넘어가서 치러야 될 결과에 대해서는 과소평가하게 그렇게 만듭니다.

 
어쨌든 여자는 그 나무 열매를 쳐다보니까 어땠다구요?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죠.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유혹에 넘어가기 시작하면 그거보다 훨씬 더 과장되게 보인다는 겁니다.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처럼 그렇게 뭐가 씌운다는 거죠. 그런데 그 결과는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거를 잊게 만듭니다. 이 유혹에 넘어가면 대박이 날 것처럼 그렇게 믿게 만들지만 현실적으로 결과는 어떻게 돼요? 쪽박을 차는 그런 상황이 돼도 그 유혹에 자꾸 가까이 다가가게 만듭니다.

 
한편 척박한 땅 광야에서 40일 밤낮으로 기도하시며 단식을 하신 예수님. 얼마나 허기지시고 모든 것이 쇠약해진 상태이실까 ?

바로 교활한 악마는 이때를 놓치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다 각자의 약한 부분이 있죠. 강론 초반에 우리 위령회장님은 그렇게 약주를 좋아하시는데, 어저께도 안 드시더라구요. 그리고 그 입학미사 끝나고 그 수육 앞에서도 소주를 안 드시는데, 아주 대단히 10 몇 년 째 사순절에 술을 딱 끊으신답니다. 그런데 저는 결심한 지 4일 만에 두 번이나 어겼죠. 사실은 세 번 어겼는데요, 금요일날 김유정신부가 밥 먹자고 해서 가서 총창 축하한다고 삼겹살 둘이 먹는데 어떻게 친구 혼자 먹게 해요? 그래서 ‘이건 희생이다!’하고 같이 먹기로 했습니다.(웃음)

 
각자가 약한 부분이 있죠. ‘나는 정에 너무 약하다.’, ‘나는 돈에 너무 약하다.’, ‘나는 맛있는 음식을 보면 그냥 무너진다.’

우리 이집트의 파라오는 그 많은 재앙으로 나라가 거덜날 판에도 꿋꿋이 버텼지만, 뭐에 가장 약했냐면, 자기 맏아들이 죽자 그냥 무너지고 맙니다.

 
우리 각자도 나는 무엇에 가장 마음이 약해질까..유혹에 쉽게 넘어갈까.. 그걸 이렇게 잘 볼 필요도 있죠.

악마는 그 약한 부분을 교묘하게 집중적으로 공략을 합니다.

허기진 예수님께 악마는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고 유혹합니다. 그런데 빵 다섯 개로 오천 명도 넘는 군중을 먹이신 그 예수님, 이 돌을 빵으로 만드는 건 아무 것도 아니죠.

하지만,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하시면서 단호하게 성경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그런데 이 교활한 악마는 이제는 그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성경말씀에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다치지 않을 거라고 이렇게 유혹합니다.

참 대단하죠. 악마는 성경 말씀까지도 유혹에 이용합니다.
‘성경 말씀이면 모든 게 괜찮다.’ 우리는 흔히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의 욕망을 채우는, 자기 생각을 합리화 하는, 그런 말씀만 찾아서 이용하는, 그런 성경말씀은 유혹에 넘어가는 악마의 속삭임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성경 말씀이 악마의 속삭임이 될 수 있을까?
참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채우고 합리화 하는데 이 성경말씀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끝으로 세상 모든 부귀영화를 보여주면서, “잠깐 눈을 질끈 감고 땅에 엎드려서 나에게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라고 유혹합니다.
참 쉬운 방법이죠. 이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40일에 광야에서 무엇을 다짐했을까? 당신이 가야될 길이 십자가의 길, 그 수난과 죽음과 고통의 길이라는 거를 준비하고 계시는데 그 어려운 길 가봐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러니 세상의 메시아로 오셨다면 나한테 절만 하면 이렇게 편하고 쉬운 길이 어디있냐?라고 그렇게 유혹을 하고 있습니다.

공생활의 시작도 전에 악마의 유혹은 편하고 쉬운 길을 선택하라고 손짓합니다. 예수님은 거기에 가타부타 뭐라고 얘기 안 하고 뭐라고 그러셨어요?
“사탄아 물러가라.”
하와와는 다른 그런 대답을 하십니다.

유혹 그 자체는 죄악이 아닙니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다가오는 수많은 도전들 앞에서 우리는 나의 자유의지로 그 유혹에 넘어갈 때 죄악에 빠지는 것이고, 거부할 때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 앞에서 자기의 선택으로 동의했고 결국 낙원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죠. 예수님께서는 그 악마의 유혹을 분명하게 물리치시고 결국 하느님의 길을, 생명의 길을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이 사순시기, 무언가 더 다짐하고 열심히 살아가려고 할 때 유혹은 더 많아질까요? 적어질까요?
열심히 살려고 하면 할수록 유혹은 더 많아집니다.
성인들 곁에는 악마가 몇 명이나 있을까요?
몇 마리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한 백 마리 쯤은 있다고 그럽니다. 성인이 조금만 빈틈을 보이면 더 유혹해서 거꾸러뜨리려고 100마리가 집요하게 유혹한답니다. 죄인 곁에는 악마가 몇 마리가 있을까요?
한 마리 정도는 있답니다. 보초 서느라고. 계속 죄인으로 사나 안 사나..웃d)
우리가 열심히 살려고 하면 할수록 유혹은 더 많아집니다. 그런데 열심히 안 살고 그럭저럭 살려고 할 때 유혹은 그다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늘 그렇게 사니까..

유혹은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늘 우리 곁에 있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그 유혹을 제대로 바라보고 이겨낼 힘이, 마음에 굳센 다짐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거겠죠.
주님의 기도 끝부분은 이렇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혹시 우리가 그런 유혹에 빠졌을 때 악에서 구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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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별빛

등록일2017-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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